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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金泰元)
본관 경주. 1870.9. 16~1908. 4. 25 일명 준, 태중(準, 太仲). 참봉(參奉) 호 죽봉(竹峯). 나주시 문평면 갈마리(葛馬里)에서 태어나 함평군 나산면 수상리(水上里)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지략과 용맹이 뛰어났으며 벼슬은 순릉참봉(順陵參奉)에 그쳤으나 국운이 기울어져 매 국사(國事)에 부심하였다. 동학(東學)에 척양척외(斥洋斥外) 사상이 있어 일시 참여하였으나 민폐가 자심하자 아우 율(聿)과 함께 수원(水原)에 피해 살았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김하락(金河洛), 조성학(曺性學),구연영(具然英), 신용희(申龍熙) 등과 함께 이천(利川)으로 내려가 그 곳의 화포군 도영장 방춘식(火砲軍都領將方春植)과 상의하여 포군(砲軍) 100여명을 모았다. 그들을 나누어 거느리고 양근(陽根), 지평(砥平), 광주(廣州), 안성(安城), 음죽(陰竹) 등지로 나가서 군사를 더 모았다. 1896년 1월 17일(음 12. 3)에 관군의 내침이 있었다. 그는 구연영, 김귀성, 신용희
등과 1초군씩을 거느리고 관군이 오는 길을 앞질러 가서 백현(魄峴)을 중심으로 매복하였다가 포위 공격하였다.
전략이 주효하여 관군은 패주하였다. 관군을 쫓아 광주의 장항(獐項) 장터까지 추격하여 무기, 군량 등 많은 물품을 노획하여 이천으로 귀환하였다. 장항전에서 승리한 후 이천, 광주를 중심으로 한 의병진의 전세는 크게 확장되었으며 그는 이들을 독려하여 한편으로 전투훈련을 하면서 이현(梨峴), 원적산(元寂山),여주(驪州), 양지(陽智) 등 요새지를 엄중히 지키고 경기의진은 26일 격문을 각 도,각 군으로 돌려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구원하자고 호소하였다. 1896년 2월 13일(음 1895. 12. 30) 이현에서 악천후 속에 관군 200여명을 맞아 크게 싸웠으나 타격을 받고 의병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2월 25일 경기 의진들이 다시 이현으로 모이게 되었다 그
는 구연영, 전귀석과 함께 광주, 이천, 양근 지방의 포수, 민군(民軍)들을 결집하여 이현에 도착했다. 이 때 김하락이 여주 의병장 심상희(沈相禧)와 타협하고 여주 의진의 일부를 거느리고 왔기 때문에 연합 병력이 2천여명에 이르렀으므로 진중의 의기가 충천하였으며 박준영(朴準英)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는 선봉장이 되었다. 새로
이 부서를 정하고 2월말 경진을 광주의 남한산성으로 옮겼으며 그는 남문을 수어하는 책임을 맡았다.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며 군수물자도 풍부하였으나 대장 박준영이 관군의 유혹에 넘어가 성문을 열어주어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그는 약간의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면서 제천(堤川)의진과 합세하여 관군과 전투를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국정이 일제에 의해 이루어지자 그는 아우 율과 함께 1907년 7월 호남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9월 그는 성재 기삼연(省齊奇三衍)이 장성에서 거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친척인 전참봉 김돈(金燉)과 의논하여 군사를 이끌고 합세하여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선봉장이 되었고 의병의 근거지는 장성군 동화면(당시 함평군 대화면)의 수연산에 있는 석수암(石水庵)과 삼계면 수옥리에 있는 왕녀봉이었다. 9월 9일 고창의 일군을 무찔렀으며 의진의 전세를 확장할 목적으로 성재와 영역을 달리하여 활동 할 것을 결의하였다.
10월 4일에는 몽암 신덕순(夢庵申德淳)과 정읍 내장사에서 만나 창의하는 일을 의논하여 덕순은 도독, 그는 선봉이 되고, 아우 율(律)은 호군이 되었다. 이 때 의병이 이미 수백명이 되었으므로 광주(光州)의 영(營)을 무찌르고 목포도 깨뜨릴 계획으로 광주에 격문을 띄었다. 그리고 군사를 거느리고 순창(淳昌)의 회문산(回文山)으로
들어가 무기를 감추어 두었던 곳으로 갔으나 이미 일군에게 빼앗긴 뒤였다. 회문산에서 회군하다가 쉬고 있을 때 적의 기습을 받았다. 이 전투에서 신덕순은 체포되어 井邑 으로 압송되고 의진은 일시에 무너졌다. 10월 31일(음 9. 25)에 무장(茂長)에 진격하여 적장을 살해하는 전과를 올렸고, 12월 7일(음 11. 3) 밤 10시경 법성포(法聖浦)에 나아가 적 10여명과 일인집 10여채를 불살랐다. 이 전투를 마치고 기삼연의 권유에 따라 기삼연 부대의 종군관(從軍官)인 전해산(全海山. 후에 독립부대 창설) 김익중(金翼中), 후군장(後軍將)인 이남규(李南奎), 그리고 김두식(金斗植), 김연석(金鍊石), 김경화(金景和), 이주현(李周鉉), 김재원(金在元), 조덕관(曺德官), 이규동(李奎東), 이상인(李象仁), 김상민(金相閔), 정인면(鄭仁勉), 임규하(林圭夏), 임종풍(林鍾豊) 등과 함께 독립부대를 창설하였는데 부대원의 수는 200명에서 400명에 이르는때가 있었다.
1907년 12월 중순부터 1908년 4월까지 그는 나주, 함평, 장성, 무안 등지를 신출귀몰하듯 휩쓸었다. 함평주재소를 습격하여 일인순사를 사살하고(1908. 1. 22) 수차례에 걸쳐 토벌대와 접전하였으며 이들 전투에서 적의 지휘자 천단조장(川端曹長)과 부하들을 사살하는 등 타격도 크게 가했지만 그의 의병진도 피해가 적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에 가장 빛나는 전과는 1908. 1. 1(음) 창평(昌平)의 무동촌(舞童村)에서 의병 토벌에 악명이 높던 8척 장
신 길전승삼랑(吉田勝三郞)을 살해한 것이다. 이 전투를 요약하면 음력 섣달 그믐날 창평의 지곡(芝谷)에 도착하여 하루를 쉬고 무동촌으로 진군하던 중 길전의 기마병에게 쫓기게 되었다. 그는 무동촌에 도착하여 자신과 정포
조덕관(精砲曺德官)외 1명이 돌담 사이에 매복하였다. 길전은 의병의 동태가 조용해지자 망원경으로 근처를 둘러본 다음 말을 타고 의기양하게 마을로 들어왔다. 매복조가 정확히 조준하여 총을 쏘았고 말에서 떨어지자 조덕관이 생사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달려갔다. 이 때 목숨이 붙어있던 길전이 권총으로 조덕관을 쏘아 전사 하였으며, 그가 달려가 칼로 찔러 죽였다. 이어 대접전이 벌어 졌고 김율의 군사와 협공하자 대장을 잃고 사기가 저하된 100여명의 토벌대가 도주했으며 길전의 쌍안경과 권총 그리고 다수의 총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조덕관외 강길환(姜吉煥)이 전사했다. 또 이날 싸움에 이운선(李雲善)이 참여하였는데 그가 전사할 때까지 활약하다가 조경환(曺京煥)의 부대가 되었으며 1909년에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 받았다. 무동촌에서 장성 월평(月平)에 유진한 그는 토천(土泉) 뒷산에 돌로 성을 쌓아 적병을 유인적장 철도삼전(鐵道三田)을 사살하였다. 이날밤 영광으로 진군하다가 낭월산(郎月山)에서 적을 만나 도포장 최동학(崔東鶴)이 죽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1908년 2월
20일(양)에는 장성 토정리(土亭里)에서 적병 50여명 사상시켰고, 3월(양)초 함평의 나산시장(羅山市場)에 진군하여 일군과 정면으로 충돌 20여명을 살해하고 수십명을 부상시켰으며, 3월 20일에는 장성군 남삼면 월암리(南三面月岩里. 현 황룡면 황룡리 월암)에서 6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5시간 동안 교전하여 전중(田中), 말연(末延)을 부상시켰고, 3월 21일(양)에 장성군 광곡에서 부하 80여명을 이끌고 잠복활동을 하다가 토벌대의 공격을 받고 암굴에 숨었다가 밤에 탈출하였으며 그 후 10여 차례 공격을 받았다. 1908년 4월 25일(양) 함평군 오산면 박산동(烏山面博山洞. 현 광주광역시 임곡동 오산리 박산)에서 지병인 요통(腰痛)을 치료하던 중 기병(騎兵) 및 특별 순사대로 편성된 토벌대에게 발견되어 교전하다가 오후 4시경 부하 13명과 함께 어등산(魚等山)에서 순국하였다. 일인들의 기록인 “전남폭도사(全南暴徒史)”에 실린 이날의 보고문을 보면, “ -전략- 1907년 11월 동생 율(聿)과 기삼연(奇三衍) 등이 호응하여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이 한창일 때는 부하가 200여명이 넘었다. 나주 부근을 본거지로하여 함평, 장성, 영광, 담양 등 각 군에 횡횡하면서 교묘하게 관헌의 손을 피했는데 1907년 2월 우리 토벌대와 장성군 서이면(西二面, 현 황룡면 일부)에서 크게 패한 후 점차 세력이 쇠퇴하였다. 동년 4월 25일 박산동(博山洞)에서 우리 토벌대와 싸워 드디어 전몰 했다.” 라고 하였다.
그의 부하들 중 체포 당한 사람들의 재판 기록을 보면 나주에서 미곡상을 하던 34세의 조정인(趙正仁)은 수백 명과 함께 400여정의 총기를 휴대하고 나주, 함평, 장성 등지에서 일군과 전투한 혐의로 1908년 6월에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 받았고, 18세의 심수근(沈守根)은 조정인의 명을 받아 나주 가산(佳山)의 탄환 제조소를 지키다 4월에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윤원거(尹元擧)는 무안군 금동면 옥동(玉洞. 현 함평군 대동면)에서 살던 사람으로 1907년 12월 14~15일경(양력) 그의 부대원들에게 숙식을 제공한 혐의로 체포 되었으며 이 때 이응문(李應文)으로부터 돈 23관을 기탁 받았고 물론 이 돈은 그의 거사 자금의 일부였다.
선열유묵첩에 그의 친필 편지가 소개 되었는데 그 필력이 웅경할 뿐 아니라 내용이 애국 충정에 절절하여 이은상(李殷相)이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국가의 안위가 경각에 있는데 의기 남아가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느냐? 진충갈력(盡忠竭力)하는 것이 의(義)에 마땅한 일이요 창생을 건지는데 뜻이 있을진데 명예를 위하는데 있지않다. 병(兵)은 죽을 곳에 웃음을 머금고 들어가는 것이 옳으리라.” 동생 율(聿)에게 의거할 것을 종용한 편지다. 30세의 젊은 나이로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의로움에 순국한 그를 기리기 위해 함평공원에 공적비가 세워지고, 광주광역시 농성동과 담양 남초등학교 교정에 동상이 세워졌으며, 정부에서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아내는 외아들 경천(敬天)을 기르다가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아들을 문중에 맏기고 그날 밤에 자결하였다. 어등산에 묻혔던 체혼(體魂)은 1959년 국립묘지 77호에 이장하였으며 1919년에 창건한 충의사(忠毅祠. 나산면 덕림리 덕림 소재)에서 배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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